이번엔 직장인/직장인 여행기

[여행] 17. 1. 19. 목. 오사카 여행 첫날.. 3부작 마지막 이야기

주할미 2017. 3. 9. 23:04

누군가 조종한 것처럼 연결된 세 가지 일.
오늘 하루동안 내게 벌어진 일이다.

오사카에 도착하고부터는 그럭저럭 순조로운 행보였다.
간사이 공항에서 미리 주문해둔 주유패스 이틀권과 한큐패스를 수령하고 물어물어 공항급행열차 안에 몸을 실었다.
널럴한 좌석 덕에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배고픔에 점점 손이 떨려오는 걸 느끼고는 한국에서 싸온 과자를 주섬주섬 꺼내 당을 충전했다.
아, 그래도 어찌어찌 오사카에 오긴 왔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길대로 잘 도착했다.
물론 길치인 내가 아니라 친구가 잘 안내해줬다.
신식 오피스텔이라 그런지 입구부터 위엄이 느껴진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또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고 우리가 묵을 802호 우편함을 열어 열쇠를 꺼내라고 한다. 도르르도르르 시키는대로 이리저리 비밀번호를 맞춰본다.
찰칵. 열렸다.
우편함에 열쇠가 없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래, 아마 체크인 시간이 아직 두어시간 남았기 때문이리라. 친절한 호스트의 메시지를 기억하며 애써 불안함을 지우기로 했다. 설마 숙소까지 문제일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캐리어를 끌고 나가 근처 밥집을 찾기로 했다.
정갈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일본 특유의 느낌인 밥집 하나 발견. 돈까스와 우동이 그려진 메뉴판만 보고 무작정 들어갔더니 아이고, 영어 메뉴판이 없다.
우리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겠고 노쇠한 가게 주인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한다. 그나마 조금 알아들어보이는 여직원을 데리고 상점 밖으로 나가 진열해놓은 그림을 짚어준다. 이거, 이거.
용케 베스트 메뉴가 뭐냐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멋쩍어하며 골라 준 스키우동과 적당히 무난해 보이는 돈까스를 하나씩 시켰다.
추운 날씨에도 속시원한 얼음물이 반갑다.

밥을 다 먹고도 시간이 한시간 넘게 남은 것 같아 다시 캐리어를 끌고 근처 마트로 갔다.
밥도 먹고 든든하겠다, 마트 규모도 꽤 크겠다, 신나게 쇼핑모드로 전환했다.
나의 첫 목표는 사케와 마트 사시미.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회를 안주 삼아 목 넘김이 좋은 사케를 한잔 들이켜야 오늘 아침의 그 모든 고통들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부탁 받은 이런 저런 약품에, 주전부리 할 과자도 사고 보니 어느새 시간이 3시 반. 체크인까지 30분 남았으니 괜찮겠지 하며 다시 숙소로 향했다.
두근두근 불안한 마음이 친구에게 들리지 않도록 괜히 더 큰 소리로 웃고 당당하게 우편함을 열었다.

좁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반짝이는 물건이 하나 보인다.
열쇠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다이아몬드보다 반갑다.

802호는 사진에서 본 것 딱 그대로 예뻤다. 인테리어를 전공했다는 집주인이 적당한 만큼의 소품들로 집을 채워놓았고 구조도 만족스러웠다. 드디어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까 공항에서 넘어지면서 부딪혔던 무릎이 이제서야 아파온다. 급하게 사시미와 사케를 한모금 넘기고 기분을 끌어올린다.
역시 술이 약이다. 오늘은 쉬엄쉬엄 주변을 돌아보자는 약속으로 남바 시내로 가는 전철을 탔다.

목요일 저녁이지만 번화가에는 인파가 몰렸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었을까. 딱히 지도를 들고 찾아다닌 건 아닌데 들어가는 곳마다 유명한 장소들이었다. 남들 따라 이것저것 사보기도 하고 맛있다는 타르트도 먹고 길거리 타코야키도 사먹으며 여느 여행과 다를 바 없는 첫날을 즐겼다.

한껏 좋아진 기분으로 숙소에 도착했는데 입구가 시끌시끌하다.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두명이 몇명의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제 막 체크인 하려는 사람들인가보다. 여기에 우리 말고도 이런 에어비앤비 손님이 많이 오는구나 생각하며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문이 열리자 그 여자 중 한 명이 묻는다.
"웨어 아유 프롬..?"
컬러렌즈로 검은 동자를 한껏 키운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지진난 듯 좌우로 급하게 흔들리는 게 내 눈에 보인다.
코리아라는 내 짧은 대답에 갑자기 화색이 돌며 "한국분이세요?" 외치는 두 여자의 얼굴을 보니 직감이 온다. 문제가 있구나. 그녀들은 주변에서 지금껏 도와주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땡큐 땡큐 아리가또 아리가또를 연신 외치고 갈 길을 가라며 보내준다.
이제 우리 차례인가보다. 일단 그녀들의 호스트가 보내 준 방법으로 우편함을 열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단다. 영어로 번역된대로 우리 우편함처럼 이리저리 돌려 조각을 맞춰보는데 잘 안 된다. 서너번 했는데도 여전히 열리지 않는다.
우편함 앞쪽으로 가서 좁은 구멍에 손을 넣어 그동안 쌓인 고지서와 광고지들을 빼낸다.
벌써 위태롭다. 누가 관리하는 곳이라면 이렇게 지저분하게 무언가 쌓여있을까. 손전등으로 비춰보아도 우편함 안에 작고 반짝이는 열쇠는 보이지 않는다.

마침 다른 쪽 에어비앤비 숙소 관리인으로 보이는 다른 사내가 나타났다. 다행히 우편함은 열어줬는데 여전히 열쇠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니 한참 있다가 한다는 소리가.. 미안하단다. 다른 사람에게 방을 내주었단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자기가 갖고 있는 다른 방으로 가란다. 여기에서부터 걸어서 30분, 차 타고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우리는 우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그녀들의 곁에서 생각나는 조언들을 거들었다. 그 사람의 다른 숙소로 가든지, 아예 다른 에어비앤비 숙소를 잡든지, 이도 저도 못 믿겠으면 아고다 같은 호텔 어플로 호텔을 예약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우선은 그녀들을 데리고 우리 숙소로 올라갔다. 춥고 다리 아픈 우리를 위해서 아무래도 앉아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집안의 온기를 느끼며 바닥에 앉았다. 그녀들은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하며 최대한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앉으려 애썼다. 나는 염치를 아는 그녀들을 위해 몸을 녹일 만한 우롱차를 내어줬다. 그녀들이 찻잔에 입에도 대지 않은 것은 아마 미안해서 였겠지.
우리가 가진 카스테라와 과자 몇 조각을 몇 번 더 권하고 나서야 하나 먹어보더니 맛있다고 또 사진을 찍어간다. 그 와중에 희망을 발견하는 모습이 파릇파릇 어린 청춘이다.

행여나 숙소 문제로 3박 4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여행을 다 망칠까 걱정이 됐다. 다 잊고 남은 시간을 잘 보내야 할텐데. 말이 쉽지 아마 나부터도 쉽지 않겠지. 내가 친구와 그 일을 겪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끔찍한 상상이다.
다행히 그녀들은 근처 다른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하고 우리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90도 인사를 받아본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고맙고 소중한 존재로 있어본 게 그만큼 오래 전 일이라는 것이겠지.

몇 살이냐 묻는 내 말이 스물셋이라고 부끄러운 듯 대답하는 그녀들. 아주 당연하게 내 입에서는 좋겠다, 부럽다, 좋을 때다 하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온다. 그녀들은 예의를 아는지 내 나이를 되묻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띠동갑 쯤이라 하는 우리에게 그렇게나 많냐고 놀라는 척하며 위로를 해준다.

"나도 앞으로 이렇게 다른 사람 도와주며 살아야지." 라고 다짐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여전히 개인주의자이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사회적 인간임은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오늘만큼의 선행 정도는 베풀며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